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문단 편집) == 만주 작전의 의의 == 비록 소련, 현 러시아 내에서도 유럽 전선에 밀려 크게 주목받지 못 하고 일본에서는 아예 이를 부당한 소련의 급습으로 여기는 면이 있지만 만주 작전은 현대전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는 작전술과 전략 공세의 완성이었다.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에서의 패전으로도 국가멸망 및 민족멸절의 위기를 맞이하는 상태에서, 소련의 참전은 일본군 수뇌부의 항전의지를 완전히 박살내기에 충분했다. 당시의 관동군은 사실상 정예사단이 다 빠져나간 상황에다가 [[도쿄대공습]]으로 이미 항복논의도 하는 상황이었다.[* 어떤 조건으로 항복을 해야 하느냐 정도. 무조건 항복이 아니라 결사항전을 하여 그나마 관대한.조건으로 항복하려고 노력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당시 일본은 소련을 통해 연합국과의 평화를 어떻게든 얻어내려고 했으며, 소련은 그런 일본이 마지막으로 믿고 있던 외교채널이었다. 그리고 관동군은 비록 약체화됐다고 하지만 그 숫자가 60만에 달하던 군대였다. 그 둘을 동시에 소련이 갈아버렸으니 심리적 타격이 막심했을 것이다. 또한 미국 [[UC 산타바바라]]의 일본계 미국인 하세가와 쓰요시 교수는, 저서 에서 기존의 통설을 뒤집고, 일본이 항복을 결심한 결정적 이유는 관동군의 붕괴였다고 서술했다. 일본으로서는 소련군이 본토에 상륙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부득불 미국에 항복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서술은 미국학계에서는 큰 반론을 받았지만, 하세가와 교수는 그동안 미국학계가 손대지 못했던 당시 일본 지도층 사이의 의견교환을 나타낸 일본어 자료를 광범위하게 이용한 연구를 했기 때문에,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미국이 태평양전쟁의 대부분을 수행하고 승리하는걸 부정하는 말이 아니며 일본이 패배한 이유는 미군에게 말 그대로 모든게 박살났기 때문인건 아무도 반론할 수 없다. 그럼에도 당시 폭주중이었던 일본의 전쟁 의지 세력들의 정신세계를 미국인들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제 전장에서의 결과와는 다른 최종적인 종전 과정에서의 차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첫째, 2차대전 일본의 전쟁은 둘로 나뉘어진 일본 육군과 해군이 자기들의 국력과 타 군의 상황따윈 일절 상관않고 자기들끼리 벌인 2개의 양면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이중 일본 해군이 주도한 태평양전쟁은 미드웨이, 필리핀 해, 레이테 만 해전 이 3번으로 끝났음에도 GG안치고 버티면서 도쿄대공습으로 일본 국민들을 죽게 방치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관동군]]이 주도한 중일전쟁, 만주전쟁은 1945년까지 지속되었고 전선이 유지됐기 때문에 육군은 여전히 폭주를 멈추지 않았고, 결국 1944~45년에는 해군이 힘을 잃고 육군이 사실상 일본 내각, 정부, 대본영까지 장악해 자기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미국에 항복을 거부했다. 일본 육군은 미군과 싸우지 않았기에 해군에 비해 마지막까지 전쟁에 대해 낙관적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미국과 달리 소련은 진짜로 일본 열도에 눌러앉을 생각이었다. [[몰락 작전]]은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서지 일본 열도를 점령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소련은 일본을 점령해 자신들의 영토 혹은 위성국으로 삼아 주요 부동항으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즉, 일본이 항복을 하더라도 소련은 쳐들어와 대본영에서 큰소리만 내던 일본군 실세들은 물론 현신으로 숭배하던 히로히토의 명줄, 나아가 천황제의 존립까지 위험해질 상황이었다. 그러니 소련이 들어오기 전에 미국에 항복해야 최소한 패전국의 장수라고 주장해서 살아남아 자기 밥그릇을 지킬 시도라도 할 수 있었다. 셋째, 민주 진영이었던 미국과는 달리 권위주의 공산국가 소련은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개전 시점에서부터 종전 때까지 미국은 인간성을 상실한 전투의 일련 중에도 항복한 병사들에 대해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를 행했다. 미국에 유학한 일본군 장성들이 존재했고 비공식 외교채널이 그나마 있던 미국과는 약간이나마 말이 통했다. 하지만 소련에는 스탈린이 있었다. 일본을 소련의 영향권 하에 두고 싶어하던 스탈린과 일본 열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탐내던 소련군, 독소전쟁에서 처참하게 흘린 피를 일본인들을 빨아먹어서라도 채워야하는 소련 시민들에게 패전 후 일본의 미래를 맡길 수는 없었다.] 소련은 8월 9일~15일간의 전역에서 사실상 항복을 기다리고 정예가 다 빠진 관동군을 무력화시켰고 몽강자치연합과 만주국을 멸망시켰다. 소련군은 만주의 공업 기반시설을 죄다 뜯어가 시베리아 개발에 사용했다. 이후 내몽골과 만주는 결국 새롭게 탄생한 [[중화인민공화국]]에 넘겨주게 되지만,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는 서방 연합국과의 협정에 따라 완벽히 손에 넣는데 성공했으며 지금까지 러시아 영토로 내려오고 있다. 소련군 입장에서 만주 전역은 단순한 '[[소풍]]'은 아니었다. 만주의 험지를 급속도로 통과하는 것은 인적 비전투손실을 강요했으며 무단장, 후터우, 하일라얼 등에서 비록 잡병이 되었다지만 관동군은 완강하게 저항하며 어떻게든 소련군에게 출혈을 일으키려고 노력했다. 게다가 만주 곳곳의 진창, 산맥들도 골 때리는 것이었다. 장비로는 전차 및 자주포, 돌격포 78대와 야포 및 박격포 232문을 잃었다. 소련군의 전차 손실은 대부분이 일본군 대전차 자폭조에 의한 것으로 소련군은 대전차 자폭조를 스메르트니키(Смертники)라고 부르며 치를 떨었다. [[소련군]]은 스스로 이 전역을 연구하면서 3가지 전훈을 도출해 냈다. 1.공세에 필요한 적 주요 방어선을 공격하는 부대의 편제는 항상 상상력 있게(유연성 있게) 편제하라. 2.진격 제대는 항상 시간차를 두고 진격하여 연속적인 공격을 하라. 3.모든 부대에 기동 선견대를 편제하라. 이를 통해 [[소련군]]은 [[독소전쟁]]과 마찬가지로 전 부대의 철저한 기동화, 차량화가 얼마나 유용한지 만주 작전에서 한번 더 확인했다. 이는 항상 소련의 모든 소총병 군단과 사단에 여단~사단급 기동 선견대를 배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주코프]]가 국방상이 된 후 소련의 모든 소총병 사단을 차량화소총병 사단으로 바꾸며 모든 제대에 화력, 기동력, 작전지속력을 증강하는 데 큰 전훈이 되었다. 만주 [[전역]]은 결국 현대 소련군과 [[러시아군]]을 완성시킨 [[전역]]이라 볼 수 있겠다. 한편 정치/외교적으로 볼 때에, 치스차코프의 제25군은 8월 24일에 [[함흥]]에 임시 사령부를 설치하고 북한 사정을 정탐한 뒤 [[평양]]으로 진군했다. 메레츠코프는 함흥이 한반도 북부의 중심지인 줄 잘못 알고[*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함흥 남단에는 흥남공업지대라는 일본을 제외한 동북아시아 최대의 화학공업 단지가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흥남공업지대에는 수력발전소, 화력발전소, 도쿄의 [[이화학연구소]] 분실(分室), 아시아 최대의 질소비료공장, 야금제련소, [[제철소]], [[조선소]], 각종 군수 공장 등 중화학산업시설이 즐비했고 그만큼 노동자 층이 상당했다. 반면, 평양은 서비스업과 상업이 발달한 소비 도시였다.] 함흥에 군정 사령부를 설치할 것을 명령했으나 치스챠코프의 설득으로 계획을 취소했다. 그리고 8월 26일, 치스차코프는 평양에 입성했다. 그리하여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소련군]]이 한반도 북부에 주둔하게 되고, 한반도 남부에는 [[미군]]이 주둔하게 되어 오늘날 분단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분류:1945년 전투]][[분류:소련-일본 전쟁]][[분류:만주국의 역사]][[분류:몽골-일본 관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